인권변호사 이어 '王수석'
盧 비서실장 거쳐 친노 큰형…
10일 별도 취임식 행사 없이
2022년까지 5년 임기 시작
문재인(64) 대통령 당선인 은 6ㆍ25 전쟁 중이던 지난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도에서 아버지 고 문용형씨와 어머니 강한옥(90)씨 사이에서 2남 3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경도 흥남 출신으로 전쟁 때 월남했다. 부친의 사업 실패 후 어린 문재인은 어머니의 연탄배달을 도우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1년 펴낸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서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중략)…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고 썼다.
#문제아
부산 명문 경남고(25회)를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술ㆍ담배에 손을 댔고 싸움을 하다 정학도 당했다. 중ㆍ고교 때 별명이 ‘문제아’였다. 재수 끝에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72학번)에 들어갔다.
#1974년 영부인 김정숙 여사와의 만남
법대 72학번 문재인은 같은 대학 2년 후배(성악과 74학번)인 김정숙(63) 여사를 지난 1974년 대학 축제 때 파트너로 만났다. 축제 이후 마주칠 때마다 간단히 인사만 했던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은 이듬해인 1975년 유신반대시위 현장에서 시작됐다.
문 당선인은 지난 2월 9일 JTBC ‘썰전’에 출연, 김정숙 여사와의 만남에 대해 “비상학생총회를 열어서 시국토론 연설을 했다. 선두에 서서 교문을 향해 나가다 가스차의 최루탄을 맞았다. 1m 코앞에서 발사를 했는데 응축된 걸 그대로 맞아 순간적으로 기절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누군가가 김정숙 여사다.
#1975년 8월 강제징집 특전사
경희대 4학년 때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가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돼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그의 전과기록에는‘특수공무집행방해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이라는 죄명에 처분일자는 1975년 6월18일로 기록돼 있다. 대학에서도 제적당했다. 강제징집돼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에 입대했다. 1978년 2월, 31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1980년 사시 합격
복학도 취업도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 문용형씨가 돌아가신 뒤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에 들어가 고시공부에 몰입했다. 문 당선인은 지난 4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당에서 공개한 ‘59문59답’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이라는 질문에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잘 된 모습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듬해 1979년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시위와 공부를 병행하던 당시 문재인은 계엄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1980년 청량리경찰서에서 2차시험 합격증을 받았다. 차석으로 최종합격했다.
#1981년 결혼
사법연수원 시절 7년 연애한 김정숙 여사와 1981년 결혼했다. 7년동안 김정숙 영부인은 문 당선인의 대학ㆍ감옥ㆍ군대 생활을 함께 했다. 지난 4월3일 더불어민주당의 문 후보와의 ‘59문59답’에서 당시 문 후보는 “프로포즈는 어떻게 했나”는 질문에 “아내가 먼저 했다. 친구들과 있는데 아내가 와서 갑자기 ‘재인이 너 나랑 결혼 할거야 말거야? 빨리 말해!’라고해서 깜짝 놀라‘알았어’라고 했다”고 답했다.
#1982년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시위경력으로 인해 희망했던 판사가 되지 못했다. 사법연수원 동기는 고 조영래 변호사, 박원선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관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등이다. 1982년 부산으로 낙향했다.
이곳에서 문재인의 운명을 바꾼 변호사 노무현을 만났다. 1980년대 후반 당시 부산에선 4명의 재야 인권 변호사가 안기부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김광일ㆍ이흥록ㆍ노무현 그리고 문재인이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근로자를 돕고자 한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농성 때는 82m의 크레인 꼭대기까지 올라가 변론했다. 주변의 만류에 “거기에 노동자가 있고 나더러 도와 달라 하는데 가봐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2002년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2002년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대위본부장을 맡으며 정계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한 행사에서 문재인을 소개하면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했다.
#2003년 청와대 민정수석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서 “민정수석으로 끝낸다”는 조건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검은 비닐 봉투에 속옷ㆍ양말만 싸 들고 상경했다. 이후 시민사회수석ㆍ비서실장을 맡았다.
#2004년 2월 민정수석 사퇴
총선 출마 압력을 받자 청와대를 나왔다. 그 사이 스트레스로 치아 10개를 뽑아낼 정도로 격무에 시달린 이유도 있었지만 그해 4월 총선에 출마하라는 당시 열린우리당의 요구를 거절하며 생긴 불편함도 있었다. 그러다 히말라야 트레킹 중 접한 대통령 탄핵 소식에 변호인단 간사로 돌아왔다.
#2004년 5월14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기각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이 2004년 3월 12일 야당 국회의원 193명의 찬성으로 가결됐지만 두달만인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다
#2004년5월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탄핵심판이 기각된 뒤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 2004년 7월 제10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문재인(당시 51세) 시민사회수석은 어머니 강한옥(당시 77)씨와 함께 북한에 사는 이모 강병옥(당시 55)씨를 금강산에서 만났다.
#2005년 1월 두번째 청와대 민정수석
2005년 다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6년 6월까지 역임했다.
#2007년 3월 청와대 비서실장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2008년 2월까지 역임하며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처음과 끝을 같이 했다.
#2007년 10월 2일~4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
문 당선인은 2007년 10월 당시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이었다. 문 당선인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당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비서실장을 지내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컸던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북핵문제로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확실한 원칙을 단호하고도 일관되게 밀어붙였다.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하다 보니 공화당 부시 행정부도 결국 대북 강경일변도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로 가닥을 잡았다”고 밝혔다.
#2009년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문재인은 노무현 국장(國葬)의 상주였다.
#2010년 8월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 당선인은 지난 2009년 노 전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 한뒤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재단 상임이사를 거쳐 2대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011년 6월15일 『문재인의 운명』 출간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문재인을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문 당선인은 당시 이 책 맺음말에서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우리야말로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우리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