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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 존경받던 창업주에서 기쁨조까지

황제경영의 폐해 [권대정 기자 2018-07-21 오후 8:45:54 토요일] djk3545@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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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아시아나, 두 항공재벌 ‘영욕의 반세기’ 

창업주 경영철학 온데간데없이 
자본권력 향유하고 형제간 싸움
황제경영 폐해, 한국현대사 민낯
 

한진그룹의 대한항공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아시아나항공. 두 항공재벌의 역사는 해방 이후 한국사와 맞물린다. 트럭 몇 대로 운송 사업을 시작한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은 미군의 믿음을 얻어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따냈다. 군부독재 정권에 협력해 대가를 얻어내거나 베트남 파견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조중훈의 사업수완만큼은 뛰어났다. 해방 후 광주에서 자동차 두 대로 택시 사업을 시작한 금호아시아나 창업주 박인천은 ‘시간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버스’인 광주여객을 세웠다. 그는 정권에 줄을 대기보다는 직원들과 동고동락했다.
 
지금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은 창업주의 철학과는 먼 곳에 가 있다. 총수 일가의 갑질, 밀수, 조세포탈, 배임, 경영상 판단착오, 성추행…. 두 기업의 직원들은 광화문광장과 청와대 앞에서 총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조직력 강한 노동조합이 아닌 일반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결성해 거리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여객운송 사업의 특징상 독점지위를 누리게 돼 황제경영을 강화시켰다”(이한구 수원대 교수)는 지적도 나오고, “항공업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직원들의 서비스 품질을 향상시킨다는 미명 아래 잘못된 관행이 만들어졌을 가능성”(김진방 인하대 교수)을 짚는 목소리도 있다.
 
아버지 세대가 ‘자본권력’을 일군 과정과, 이 권력을 향유하고 서로 더 갖겠다고 싸우면서 노동자들은 뒷전에 두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다. 김 교수는 “이번 사건들이 재벌 총수의 지배력 남용을 짚고 넘어가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창업주, 광주여객으로 시작 
2대 박성용, 그룹 키우며 ‘활짝’
전두환 정권, 제2 민항 허가 
이례적 ‘초스피드 결정’ 화제

3남인 박삼구 회장 취임 후 
형제 순번경영 전통 깨지고
기내식 사태·기쁨조 논란까지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로 
재계 8위까지 도약했지만
승자의 저주…결국 되팔아
  

‘오죽하면(OZKA면) 이러겠니.’ 20일 아시아나항공노동조합이 광화문에서 연 4차 집회의 이름이다. OZ는 아시아나, KA는 아시아나항공 지상여객서비스를 담당하는 협력사를 의미한다. 기내식 사태로 금호아시아나의 협력사 쥐어짜기 문제도 대두된 상태다. 박삼구 회장의 무리한 확장경영과 손실, 그룹재건 욕심 때문에 빚어진 기내식 협력사 대표의 사망 그리고 ‘박삼구 기쁨조’ 논란까지. 재계와 문화예술계에서 두루 존경을 받아온 금호는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이 1946년 ‘광주택시’에서 운영하던 포드 디럭스 36년형 택시. 금호아시아나 제공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이 1946년 ‘광주택시’에서 운영하던 포드 디럭스 36년형 택시. 금호아시아나 제공

■ 존경받는 창업주  

1967년 12월5일 ‘광주여객’ 고속버스 한 대가 서울역 앞 정차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60대의 승객에게 50대 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이 차가 정말 광주에서 오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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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마중 나오셨소?”  

“아니요. 그냥 고향차 구경 왔어라우.”  

버스에서 내린 승객은 광주여객을 세운 박인천이었다.  

“오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텐데 고생하셨겠습니다.” 낯선 남성의 말에 박인천이 답했다. “시간이 많이 걸렸재. 많이 걸리고 말고. 여기꺼정 오는 데 햇수로 딱 20년이 걸려부렀다.” 

영화감독 이창동이 쓴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전기 <집념-길 위의 길>에 실린 일화다. 44세의 나이에 자동차 두 대로 택시사업을 시작해 광주여객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호남의 사업가 박인천. 이승만이나 박정희, 주한미군에 선을 댔던 다른 창업주들과 달리 박인천이 만난 관료들은 주로 각 지역 계장들, 끽해야 도지사였다. 그들과 옥신각신하며 노선을 트고 사업을 확장했다. 

박인천의 집안은 가난했다. 어머니는 친정까지의 150리 길을 짚신을 아끼기 위해 맨발로 걸어다녔다. 그는 20대에 백목 장수, 가마니 장수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23년엔 일본에서 돈을 벌겠다며 건너갔다가 허망하게 돌아왔다. 박인천은 고향에 돌아온 후 순사를 하다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사법주임(경위)이 됐고, ‘조선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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