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광주여객으로 시작
2대 박성용, 그룹 키우며 ‘활짝’
전두환 정권, 제2 민항 허가
이례적 ‘초스피드 결정’ 화제
3남인 박삼구 회장 취임 후
형제 순번경영 전통 깨지고
기내식 사태·기쁨조 논란까지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로
재계 8위까지 도약했지만
승자의 저주…결국 되팔아
‘오죽하면(OZKA면) 이러겠니.’ 20일 아시아나항공노동조합이 광화문에서 연 4차 집회의 이름이다. OZ는 아시아나, KA는 아시아나항공 지상여객서비스를 담당하는 협력사를 의미한다. 기내식 사태로 금호아시아나의 협력사 쥐어짜기 문제도 대두된 상태다. 박삼구 회장의 무리한 확장경영과 손실, 그룹재건 욕심 때문에 빚어진 기내식 협력사 대표의 사망 그리고 ‘박삼구 기쁨조’ 논란까지. 재계와 문화예술계에서 두루 존경을 받아온 금호는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 존경받는 창업주
1967년 12월5일 ‘광주여객’ 고속버스 한 대가 서울역 앞 정차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60대의 승객에게 50대 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이 차가 정말 광주에서 오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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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마중 나오셨소?”
“아니요. 그냥 고향차 구경 왔어라우.”
버스에서 내린 승객은 광주여객을 세운 박인천이었다.
“오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텐데 고생하셨겠습니다.” 낯선 남성의 말에 박인천이 답했다. “시간이 많이 걸렸재. 많이 걸리고 말고. 여기꺼정 오는 데 햇수로 딱 20년이 걸려부렀다.”
영화감독 이창동이 쓴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전기 <집념-길 위의 길>에 실린 일화다. 44세의 나이에 자동차 두 대로 택시사업을 시작해 광주여객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호남의 사업가 박인천. 이승만이나 박정희, 주한미군에 선을 댔던 다른 창업주들과 달리 박인천이 만난 관료들은 주로 각 지역 계장들, 끽해야 도지사였다. 그들과 옥신각신하며 노선을 트고 사업을 확장했다.
박인천의 집안은 가난했다. 어머니는 친정까지의 150리 길을 짚신을 아끼기 위해 맨발로 걸어다녔다. 그는 20대에 백목 장수, 가마니 장수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23년엔 일본에서 돈을 벌겠다며 건너갔다가 허망하게 돌아왔다. 박인천은 고향에 돌아온 후 순사를 하다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사법주임(경위)이 됐고, ‘조선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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