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회식 집을 찾아라
맛과 품위 담겨야 [권대정 기자 2019-11-09 오후 3:19:17 토요일] djk3545@empas.com친구·지인·직장동료 회식 명당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는 친구들이라면 높은 테이블에 사치스러운 음식이 깔리는 곳보다는 뻘건 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 입에 넣어줄 것 같은 곳을 찾는다. 강남 논현동 '한성칼국수'에 가면 멜로디만 들어도 가사를 흥얼거릴 수 있을 듯한 익숙한 음식이 있다. 새우전, 호박전, 대구전, 굴전이 함께 나오는 전 모음은 기름기가 자르르 돌아서 잔칫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난다. 소고기 양지살 부드럽게 삶아 낸 '수육'과 돼지고기를 삶아 낸 '제육'도 상 위에 없으면 섭하다. 도봉산역 '삼오곱창'에서는 도톰한 곱창을 굽고 새빨간 국물이 이글거리는 곱창전골을 끓인다. 뿌연 연기 속에서 대화에 리듬이 붙고 좌중에 기운이 솟는다. 좀스럽지 않게 큰 국자로 푹푹 퍼 담아 주는 곱창전골에 시간을 달이고 남은 국물에 버무린 볶음밥에 여흥을 달랜다. 상암동 '차림'도 오래된 얼굴처럼 친숙한 이름이 널렸다. 어릴 적 동무 집에 가면 친구 어머니가 내주던 방아 부침개, 바삭한 감자전, 명절 고향집에 내려간 듯 푸짐한 궁중잡채, 밥 한 그릇이 그리운 코다리 갈비 등 허물없지만 정성은 아끼지 않은 맛에 젓가락이 가볍다. 맥주부터 전통주까지 망라돼 있는 주류 목록도 허술하지 않다. 왁자지껄 떠들며 고기를 굽고 씹는다면 용문동 '용문갈비'를 가봐야 한다. 뭉텅뭉텅 썬 무가 둥둥 뜬 동치미 국물은 맛만 봐도 이 집 역사가 느껴진다. 뼈가 붙은 갈빗살만 고집하는 이 집에서 내놓는 찬들은 하나같이 정겨운 옛 맛이다. 매일같이 고기를 다듬는 주인장의 고집에는 푸릇한 기상과 여전히 정정한 힘이 서렸다.
자주 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친구도 동료도 아닌 지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다. 때로 그 애매한 호칭이 주는 거리감에 마음이 외로워진다. 그러나 먼저 만남을 청하고 나의 제안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때 가져야 할 것은 고마움뿐이다. 그 고마움을 갚기 위해, 서로를 배려하는 예의를 위해 조금 더 편하고 아늑한 장소를 찾는다. 삼성중앙역 인근 '차이린'은 따로 딸린 룸이 있어 예약 모임을 적어놓는 하얀 칠판이 늘 가득 찬다. 중국 본토에서 배워 온 이름 낯선 요리가 잔뜩 있는데 그중 이국적 산미가 춤을 추는 버미셀리 냉채, 달걀 흰자와 함께 광동의 다섯 가지 보물이라는 식재료를 볶아낸 광동오슬, 돼지갈비를 한 입 크기로 잘라 튀긴 돼지갈비 튀김 등 변박과 엇박이 난무하는 격한 초식이 좌중의 감탄을 이끈다. 곡금초 셰프가 이끄는 동탄 '상해루'는 좀 더 크고 강한 맛으로 승부를 본다. 유리처럼 반짝이며 바삭한 듯 부드러운 듯 모순된 식감이 공존하는 탕수육은 감탄을 넘어 경외를 부른다. 대게 살을 빠르게 볶아 고추기름을 둘러낸 대게 살 볶음은 손이 크고 가슴팍이 두꺼운 주인장의 인심이 묻어난다. 붉게 출렁이는 와인이 주인공이라면 도산공원 '있을재'가 리스트 맨 위에 올라간다. 한국 식재료를 이탈리아 요리 기술로 버무린 주방장의 철학과 안목은 평범한 해산물 스파게티조차도 급수를 몇 단계 올려 버린다. 큼지막한 토종닭구이, 재료들이 철근과 콘크리트처럼 단단히 얽힌 라자냐, 돼지 대창에 항정살과 포르치니 버섯 등을 갈아 넣고 버터에 구운 부댕블랑 등 양과 맛이 넉넉한 요리가 있다. 여기에 버드나무처럼 유연히 와인을 추천하고 따르는 소믈리에의 허허실실한 접객이 어울려 평균 학점 4.0 이상의 저녁 시간이 보장된다. 한식을 찾는다면 신사동 '산호'가 나은 선택이다. 가지런히 편을 썬 문어 숙회를 고소한 김과 시큼한 묵은지에 함께 싸 먹으면 잊고 있던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새삼 깨닫는다. 해삼 내장과 한우 육회, 낙지 탕탕이를 한데 비비면 낮은 산자락에 엉기는 육지의 맛과 해무가 낀 바다 향기가 서서히 입에 찬다. 매콤한 양념을 올린 간재미찜은 맛을 알고 맛을 찾는 이들의 혀를 잡아당긴다.
함께하는 시간만 따지자면 가족보다 가깝다. 있는 꼴 없는 꼴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내며 얼굴을 맞대는 전우들은 우리네 일터에 있다. 그들과 함께라면 조금은 시끄럽더라도, 조금은 값이 나가더라도, 혹은 그 어디라도 괜찮다. 을지로4가 '보건옥'은 왕년의 회식 메뉴 불고기와 삼겹살, 김치찌개가 일진이다. 본래 정육점으로 시작한 집답게 불판 위 고기가 주 화력이지만 이모들 손맛이 담긴 밑반찬 지분도 상당하다. 달착지근한 불고기, 오래 끓일수록 맛이 진해지는 김치찌개, 발그레한 볼처럼 선분홍빛인 삼겹살을 인원대로 맞춰 시키면 뜨거웠던 오늘도 그보다 더할 내일도 무섭지 않다. 1년을 마감하며 호기를 부린다면 삼각지 '몽탄'도 손에 꼽힌다. 사람들이 긴 줄을 서는 이유는 먹어볼수록 확실하게 다가온다. 육질이 탱탱한 삼겹살도 좋지만 이곳의 우대갈비를 먹지 않고 자리를 끝낼 수는 없다. 웬만한 여자 팔뚝만 한 뼈가 붙은 소갈비를 짚불에 훈연한 후 솥뚜껑 위에서 마무리한다. 잘 훈련된 종업원들이 병아리 다루듯 한 점 한 점 구워 갈빗대 위에 올려 주면 젓가락질만 남는다. 미국식으로 두툼한 고기를 호쾌하게 굽자면 청담동 '더미트퀴진'에 가보자. 편안한 실내와 절도 있는 직원들은 한 해를 기념하고 우리를 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요리사가 직접 나무를 때 불을 일으켜 구운 고기에는 태곳적 불의 기운이 초콜릿처럼 진하게 묻어난다. 버터 함량을 높여 부드럽게 녹아나는 식전 빵 브리오슈, 식사 대신 먹을 만큼 풍성한 시저샐러드, 미국 버번 위스키를 마시는 듯 강하고 달게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스테이크의 무게감에 몸속 피가 더 붉게 흐른다. 여의도로 가면 '여의도 아쿠아리움'이란 별명이 붙은 '쿠마'가 있다. 그날그날 잡히는 생선과 해산물로 한 가지 코스를 내놓는 이곳에는 요리사보다는 원양선 선장이 어울리는 사내가 있다. 관운장의 언월도처럼 크고 긴 칼로 생선을 잘라 손님들에게 한 주먹 한 주먹 내주는데 그 양과 질이 탈(脫)유라시아급이다. 빨갛게 물든 참치 등살, 지방이 올라 소고기처럼 하얀 마블링이 낀 방어 뱃살, 한 사람당 한 대접씩 받게 되는 매운탕이 커다란 상을 빼곡히 채워도 삼천포 출신 주인장은 더 주지 못해 안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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